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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제 5 호 우리의 자하(紫霞), 자줏빛 노을은 어디에서 왔을까?

  • 작성일 2023-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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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13892
이다현

수습기자 이다현 202110233@sangmyung.kr


<상명대학교와 보랏빛 노을, 紫霞>

  “이번 정류소는 자하문 터널 입구, 석파정입니다.” 많은 상명대학교 학생이 이용하는 7016번 버스를 타면 다음과 같은 안내를 들을 수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인문사회대학관, 자하관이 나타난다. 가끔은 샘물 메시지로 자하 교지가 발간되었다는 소식이 도착한다. 우리는 학교에 오며 자하를 마주한다. 심지어 얼마 전 자하관에 생긴 라운지 이름마저도 자하와 비슷한 자운(紫雲)이다. 자하가 무엇이길래 우리의 곁에 존재하는 것일까?

  학교에서 자동차로 약 10분, 종로구 청운동에는 사소 문 중 하나인 창의문이 있다. 창의문은 북문(北門), 장의문(藏義門) 혹은 자하문(紫霞門)으로 불린다. 장의문이라는 이름은 안쪽에 장의동이 있어 만들어진 별칭이다. 왕조의 공식 문서에는 없지만, 민간에서 가장 널리 불린 이름은 자하문이다. 자하문 별칭의 유래는 다양하다. 이 중 가장 신빙성 있는 유래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개성의 송악산 아래에 있는 명승 자하동처럼 골이 깊고 수색이 맑고 아름다워 이름이 붙은 자핫골에 위치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름에서부터 다양한 이야기를 안고 있는 자하문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가진다. 이성계는 개경을 떠나 한성을 새롭게 도읍으로 정하는데 경복궁을 비롯한 한성의 성곽과 성문을 쌓았다. 그때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이라는 사대문을 만들고, 그 사이 동북쪽에 홍화문(弘化門),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 서남쪽에 소덕문(昭德門), 서북쪽에 숙정문과 돈의문 사이에 위치하는 자하문(紫霞門)이라는 작은 문을 만들었다.

 

<紫霞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조선시대의 자하문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든든한 성문보다는 고요한 성문이었다. 자하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건설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폐쇄된다. 성을 짓는 일과 같은 때에만 한시적으로 개방되었고, 연산군 때에는 근처에 사는 이들을 모두 쫓아내기도 했다. 이후 자하문이 역사에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인조반정 때이다. 1623년(광해군 15년) 김류와 이귀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홍제천에 모인 후 자하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가 창덕궁을 공격했다. 『인조실록』 1년(1623년) 3월 13일의 기록에는 ‘밤 3경에 창의문(자하문)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선전판으로서 성문을 감시하는 자와 마주쳤다. 선봉 부대가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라고 쓰여있다. 이후 창의문은 양란을 거치고, 영조 대에 이루러 개축되는 등의 변화를 거쳤다.

  고요하던 자하문이 다시 소란스러워진 것은 해방 이후 1968년 1월 21일이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 군부대 소속의 31명은 청와대 습격과 암살 명령을 받고, 휴전선을 넘어, 수도권까지 잠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검정 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검문 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많은 시민이 살상당하기도 했다. 이후로 한국전쟁에 대한 공포가 전국을 강타했다. 자하문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폐쇄되었고, 청와대 보호를 명목으로 한 스카이웨이 건설로 경관이 크게 손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자하문 자체에 대해서는 지붕과 기와를 교체하는 등의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하문이 다시 사람들을 맞이한 것은 19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청와대 주변 지역이 개방된 시점부터였다. 1993년에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어 완전히 개방되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자하문은 어떨까? 학교에서 자하문까지 가는 길, 여러 가지 중 하나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우선 학교에서 언덕을 내려가 직진한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보인다. 미술관을 지나 계속 걷다 보면 레이지버거클럽, 고블린 피자, 란저우육면, 부빙 등 유명 맛집이 등장한다. 식사 시간이라면 이곳 중 하나를 골라 식사하고 다시 길을 걸어보는 것도 권하고 싶다. 식사를 즐겁게 마치고 나왔다면 윤동주 문학관을 지나, 서울의 전경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 최규식 경관 동상이 보이는 길을 건너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하문이 나온다. 


  

  위 사진들은 지난 6월 자하문을 방문하여 촬영한 사진이다. 1학기에 동기와 함께 길을 걸었을 때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며 길을 걸었다. 길을 거닐며 첫 번째로 느낀 것은 ‘너무 습하고 덥고 힘들다!’ 였지만, 풍경은 아름다웠다. 초목이 우거져 초록빛이 가득했다. 여기가 정말 서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하문은 엄청나게 웅장하다거나, 주변의 건축물이 풍성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부터 자하문까지의 거리는 고요하고, 푸르고, 아름답다. 또 근처 청운공원에서 가벼운 소풍을 즐길 수도, 더 걸어 서촌을 찾을 수도 있다. 혼자 사색을 즐기며 걷기도 좋고,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도 좋은 곳이다. 강의가 일찍 끝났거나 우주공강이 생긴 날에 한 번쯤 찾기 좋다. 자하문을 그저 학교 가는 길 지루한 길목 중 하나로 여기는 것보다 대학교 다닐 적 추억의 장소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紫霞와 자하교지>

  우리가 그저 스쳐 지나갔던 자하는 기나긴 시간부터,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까지 품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 받은 이름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흐린 날 노을은 가려지고, 맑은 날 노을은 무엇보다 빛난다. 자하문은 풍수지리를 이유로 폐쇄되기도 하고, 역사를 바꾼 중요한 장소가 되기도 했으며, 다시 폐쇄되었다가, 현재는 또다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자하문은 역사 속에서 묵묵히 저의 자리를 지키며 가장 빛나고 사연 많은 성이 되었다.

  숭례문 문루가 불타고 복원된 현재 자하문 문루는 한양도성 문루 중 가장 오래된 문루이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곳도 자하문이다. 하지만 고가도로의 건설 등으로 경관이 많이 훼손된 곳 또한 자하문이다. 과거 우리는 인간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개발에만 집중했지만, 현재는 공존을 가치로 두고 있다. 과거와 공존, 자연과 공존은 오랫동안 함께하기 위함이고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필수적이다. 가장 오래되었고, 여러 이야기 담긴 자하문의 앞을 가로막은 고가도로를 정리하는 등의 노력이 있다면 우리는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는 한양도성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자하문이 아름답기만 한 자줏빛 노을이 아니라, 해가 지며 모든 것에 스며드는 자줏빛 노을이라는 생각한다. 상명대학교의 ‘자하’ 교지편집부는 모든 것에 스며드는 자줏빛 노을답게 52년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며, 사회와 학교 전반에 스며든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소수자부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이야기까지. 앞으로 자하 교지편집부는 흐리고, 맑은 날을 가리지 않고 노을을 빛내며, 언제나처럼 저의 자리를 지키는 자하문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서서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참고 문헌 ]

1. 서울 한양도성[웹사이트]. (2023.5.7). https://seoulcitywall.seoul.go.kr/content/8.do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웹사이트]. (2023.5.12).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7307

3. 한양도성박물관 (2015), 창의문과 사람들 : 2015년 한양도성박물관 상반기 기획전, 서울: 한양도성박물관